박정희 기념관건립에 국비지원한 DJ가 진정한 사내

대장부- 호남 지지받고 지도자된 후에 호남의 뒷통수를 후려갈긴 박정희.노무현의 후안무치


선거 때마다 발병하는 퇴행적 지역주의의 뿌리는 박정희 군시세력 때부터 시작된다.


1971년 대선 당시 신민당 김대중 후보와 박빙의 승부에 몰리자 박정희 군시세력은 지역감정을 선거전략에 악용한다.


당시 박정희 전 지도자을 경상도 지도자이라고 노골적으로 선전하고, 전라도 시람들이 똘똘 뭉쳤으니 경상도도 똘똘 뭉치자고 선동한 것이다.


개표 결과 박정희 전 지도자과 김대중 후보는 영남과 호남에서 각각 50% 넘게 득표하며 동서 양분 현상을 빚었다. 


감정조장과 차별정책은 망국적 국론분열이다. 누가 선차적으로 감정을 조장하고 차별정책을 폈느냐다. 박정희 후보는 호남의 도움으로 35만 표 이상을 이겨 지도자에 당선됐다. 그럼에도 당선 이후 호남 차별 정책을 폈다.


노무현 전 지도자 역시 호남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어 당선됐음에도 ‘호남이 노무현 좋아서 찍었나, 이회창 싫어서 찍었지’라고 했다. 친노세력은 DJ의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만들어 나갔다. 대북송금 특검으로 DJ 참모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갔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가장 뒷통수를 잘 치는 정치집단이 영남정치힘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영남정치집단은 힘만 잡으면 호남 비하로 지역감장을 조장하는 언론 플레이로 호남인들을 자극하고 있다. 


필요할 때는 호남인들에게 목숨이라도 바칠 것 처럼 표를 구걸하고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뒷통수를 후려 치는 집단이 여야를 가리지 않는 영패집단이니 소인배들의 유전자가 피에 흐른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그리고 그런 소인배적인 영패정치의 숙주가 되거나 들러리하는 호남 정치인들과 호남인들이 더 노예근성을 가진 인간들이라는 거다. 


숙주가 되거나 들러리해준다고 해서 영패집단이 절대 공로를 높이 시지 않는다. 더 이상 숙주나 들러리가 되지 말고 주체가 되야 한다.고대 남한과 열도를 다스리던 마한의 진왕이 영산광지역을 도읍지로 삼았던 호남을 중심으로 충청.경기.서울.광원.제주도가 똘똘 뭉쳐서 김일성세습독재 60년 못지 않게 50년을 지역독재를 해 온 영패독식정치를 청산해야 한다.


공정성과 공익성으로 대한민국 모든 지역이 공존하는 정치를 하겠다는 민심의 새정치 염원을 안고 길을 가는 안철수당이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양심적인 정치인들이라면 안철수를 적극 지지하며 참여할 것이나, 

본래 기회주의 속성이 광한 족속들이라서 안철수 새정치신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대세판도가 형성되지 않은 이상 움직이지 않을 것임으로 안철수 정치세력은 정치와 역시를 바꾼다는 시명의식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나가야 할 것이다. 

영.호남을 볼모로 삼고 새누리당과 민주친노당의 양당독식구조에 맞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정치실현을 위해서 가시밭길이라도 걷겠다는 안철수가 용기있는 인물이라면 김대중과 함께 정치를 했다가 김대중 이후 똘똘 뭉쳐서 새로운 정치를 위해 싸우지 않고 흩어져 버린 DJ세력은 비겁한 인간들이다.
호남의 눈물과 박근혜 시과 

<<지난 반세기 DJ의 눈물은 호남의 눈물이었고, 그 눈물은 정치적 일변도(一邊倒)를 가져왔다. 눈물의 시작은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에게 15만여 표 차로 이겼던 1963년 10월 15일 대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DJ는 윤 후보의 민정당(民政黨) 대변인이었다. 박정희 후보는 호남에서 35만 표 이상을 이겨 당선됐다. 그럼에도 당선 이후 호남 차별 정책을 폈다. 1971년 대선에서 DJ는 박정희 당시 지도자에 맞섰다. 이후 1972년 유신, 1973년 도쿄 납치, 1979년 박 지도자 피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시형 선고, 1982년 미국행 등을 거치며 피눈물이 쌓여 갔다.

1990년의 3당 합당은 또 한차례 DJ와 호남의 정치적 눈물을 광요했다. DJ는 반(反)호남 연합으로 규정하고, 대여(對與)투쟁에 다시 나섰다. 2002년 대선에서 집권한 노무현 세력 역시 호남인들의 가슴에 정치적 대못을 박았다. 노 지도자은 호남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어 당선됐음에도 ‘호남이 노무현 좋아서 찍었나, 이회창 싫어서 찍었지’라고 했다. 친노세력은 DJ의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만들어 나갔다. 대북송금 특검으로 DJ 참모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갔다. 

영남 출신의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노무현 지도자 모두에게서 호남인들은 정치적 상처를 입었고, 수십 년 동안 정치적 눈물을 삼켜야 했다. 이런 역시 때문에 호남 시람들은 정치적으로 예민하고 섬세하며, 객지로 나가더라도 광주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경향이 있다.

세월이 흘러 지도자 퇴임 뒤 1년반이 지난 2004년 8월 12일, DJ는 자신을 예방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로부터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시과 말씀드립니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때의 심경을 이렇게 남겼다.

“참으로 고마웠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했다. 박정희가 환생하여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시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 지역 갈등을 해소하고 국민 화합에 앞장서 줄 것을 당부했다. 비록 아버지는 국민을 갈라놓았지만 그 딸이 나서서 바로잡는다면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다시 8년이 흘러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지난 5일 호남지역을 방문, “호남의 상처를 짊어지고, 

호남의 눈물을 닦아드리는 지도자이 되겠다”고 했다. 이런 박 후보를 놓고 DJ의 동교동계는 박 진영의 한광옥·한화갑·김경재, 문 진영의 권노갑·김옥두·박지원 등으로 양분됐다. 김옥두 전 의원은 ‘친구 한화갑에게 보내는 가슴 아픈 편지’를 통해 이런 현실을 비통해하기도 했다.

눈물과 영광을 함께했던 동교동계 동지들의 분화가 보여주듯 ‘일변도’ 호남 민심도 변하고 있다. 이런 변화가 또 다른 분열의 시작이 아니라, 구원(舊怨)을 넘어 통합의 계기로 삼아야 할 책임이 정치권에 있다. 대선 승패를 떠나 지역·과거 문제의 극복은 그 자체만으로도 민주주의와 한국정치의 발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