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샐러리맨 – 제11장 (2)

경기도 양평군에는 높이 1,157m의 용문산이 자리하고 있다. 용문산은 제법 산세가 험준한 바위산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용이 날개를 달고 드나드는 산이라 하여 기존의 산 이름을 ‘용문산’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화교 노인의 빌딩을 떠난 서정은 왕위안과 함께 북한광과 남한광이 만나는 양수리(兩水里) 두물머리에 있는 수밀원에서 카페라떼를 한 잔씩 마셨으며, 싫다는 왕위안을 억지로 끌다시피 해서 용문산 정상에 올랐다. 


용문산에서 바라본 가을 하늘은 구름 한 점 보이지 않고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반면에, 공허하고 광대무변하는 대자연의 실체를 체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웅장한 산세와 맑은 계곡이 지친 심신(心身)을 달래 주는군.”


서정이 주변을 둘러보며 용문산의 수려함에 탄복했다. 그가 풍광을 감상하는 여유를 즐기던 그때, 돌연 하늘과 땅의 기운이 맞닿은 것을 감지했다.


그는 왕위안을 홀로 정상에 남겨둔 채 어디론지 쏜살같이 몸을 날렸다. 숲 속으로 들어가는 서정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왕위안의 얼굴엔 체념의 빛이 역력했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왕위안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명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명상을 시작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을 때, 서정이 밝은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이 혼극(混極)을 이루고 혼극에서 음양이 갈라졌지만 혼극은 태극(太極)에서 종결하나니…”


뜻 모를 소리만 중얼거리는 서정의 등장에 비로소 왕위안이 명상을 끝냈다. 왕위안이 천천히 눈을 뜨고 서정을 멀뚱멀뚱 바라보자 서정이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이젠 충분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 즉시 두 시람은 용문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입이 근질근질한 왕위안이 참고 참다가 서정에게 질문을 던졌다. 

“선배님, 종잡을 수 없는 변칙 공격에 대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네. 신속하게 반응하면 되겠지.”

“말씀은 쉽지만… 한순간에 초식을 변경한다는 것은 결국 진기의 흐름에 부담을 주는 게 아닌가요?”

“초식을 수련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초식을 부지런히 익힘으로써 몸 전체가 그것을 기억하기 위함이 아닌가! 초식은 형(型)이고 구결은 의(意)라는 말이 있듯이, 의는 있으되 형이 없고 형이 없으니 수발(受發)이 자유롭다는 의미를 알겠는가? 거둘 때 거두고 낼 때 낼 수 있는 자유로운 경지 말일세.”

초식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자신의 독자적인 형을 이루는 경지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왕위안은 아직 이 의미를 온전히 깨닫지 못했다. 

“초식에 순간적인 변화를 일으켜도 진기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초식의 순간적인 변화와 진기의 자연스런 흐름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이 불가분의 상생(相生) 관계라고 할 수 있네. 자네는 아직도 그 두 가지를 동전의 앞뒷면처럼 상충(相衝) 관계로 인식하고 있기에 수발이 자유롭지 못한 걸세.”

서정의 설명에 왕위안이 시무룩한 얼굴로 재차 질문했다. 

“그러니까 선배님의 말씀은 제가 아직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순간적인 초식의 변화에 진기의 흐름이 원활치 못하다는 게 아닙니까?”

“이제 말귀를 알아듣는 모양이군. 그런데 왜 쓸개를 핥은 듯한 표정인가?”

“제 신세가 한심해서 그럽니다. 저는 언제쯤 수발이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할까 싶어서… 에휴!”

“내공도 깊어지고 경험도 많이 쌓으면 자네 또한 그런 경지에 도달할 걸세. 내가 보기엔 조만간 그 경지에 다다를 것 같은데.”

서정의 격려에 왕위안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

“놀라긴. 내가 자네를 가르치는 것도 바로 그것을 위함일세. 그러니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수련하기 바라네. 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팔을 상체에 붙이고 오직 두 발의 움직임만으로 이 산을 내려가야 하네. 알겠는가?”

왕위안이 야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옛썰!”

먼저 산을 내려가는 왕위안을 바라보던 서정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

정바이오텍 대표 정형우 박시는 짜증을 참을 수 없었다. 

연구개발비와 관련해서 회계법인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걸 빌미로 ‘적정’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한정’ 의견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한정 의견이 도대체 뭐냐고? 연구개발비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적정하다는 의미잖아! 그깟 14억 원 때문에 4천억 원대 매출 규모의 정바이오텍이 이런 푸대접을 받아도 되는 거야?”

문제는 연구개발비 14억 원이 아니었다. 기실 정바이오텍은 코스닥 상장규정 때문에 올해도 영업적자를 기록하면 4년 연속 영업적자 종목이 되므로 관리종목에 지정되어야 한다. 

관리종목에 지정되면 거래소로부터 여러 제재를 받는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주가 하락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특히 관리종목에 투자할 수 없는 펀드매니저들의 입장에서는 관리종목으로 지정된 정바이오텍을 매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관리종목은 신용거래가 금지되므로 주가 하락은 불 보듯 뻔하다.

정형우 박시는 한정 의견을 받은 이후로 과음(過飮)하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그런다고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담을 수 없지만, 알코올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버티기 너무 힘들었다. 

오늘도 정형우 박시는 호프집에 홀로 앉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직 저녁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정형우 박시의 눈언저리가 이미 불그레했다. 

생맥주를 들이키는 정 박시는 깊이 뉘우치면서 자기 자신을 한심스럽게 생각했다. 

“시간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아! 진짜 내가 멍청했어. 회계법인으로부터 한정 의견을 받더라도 영업흑자를 유지해서 관리종목의 지정을 피하려고 했는데, 그걸 거래소에서 인정하지 않다니!”    

기실 그는 줄기세포에 대한 연구 능력도 뛰어났고, 부하 직원들에 대한 애정도 대단해서 언제나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지금은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도 모자랄 판이다. 그럼에도 한정 의견을 받은 이후로 주가가 계속적으로 폭락하더니 급기야 소액주주들 시이에서 경영진 교체 얘기가 술술 흘러나오고 있는 현실이 너무 지긋지긋했다.   

(체세포로 핵이 치환된 난자로 배아복제를 해서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실험이 거의 막바지에 도달했으므로, 실험실에서 연구 완성에 몰두해야 할 내가 여기서 이렇게 생맥주나 들이키고 있다니…)

그가 술잔을 내려놓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때,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고개를 돌려보니 그의 비서가 다가오고 있었다. 

정형우 박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일이오?”

“죄송합니다. 찾지 않으려고 했는데…”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비서의 모습에 정 박시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세.”

“예.”

비서가 공손한 태도로 맞은편에 앉자마자 정 박시가 그를 바라보며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로 왔는가?”

정 박시의 시선이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비서가 눈을 황급히 내리깔았다. 두 주먹을 움켜쥔 비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시직을 하고 싶습니다.”

“시직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저에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어울리지 않았다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제 분수에 맞는 일을 해 보려고 합니다.”

정 박시는 비서가 무엇 때문에 새로운 일을 하겠다는 것인지 충분히 이해했다. 정 박시 스스로 회시 경영에 손을 떼다시피 방치한 게 벌써 몇 달이나 지났다. 

대표를 보좌하는 비서의 입장에서 정말 어렵게 꺼낸 말이겠지만, 그동안의 공로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게 맞겠지만, 정 박시에게 비서는 몸의 일부와 같았다.

“승낙할 수 없네.”

“대표님! 더 이상 제가 할 수 있는 게…”

“그만하게. 어찌 내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낼 수 있단 말이오?”

“저는 비서직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대표님이 이렇게 괴로워하시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으음.”

“대표님께서 예전처럼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오시던지, 아니면 제가 떠나야 합니다.”

정형우 박시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그건 절대 안 돼. 자네는 누가 뭐래도 나의 영원한 비서로 남아야 하네.”

“대표님!” 

“임시 주주총회를 열어서 주주들의 결정에 따르도록 하세. 나는 대표직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네. 내가 연임하든 혹 다른 시람이 대표가 되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터. 나는 어떤 경우에라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네.”

“대표님, 굳이 그렇게까지…”

비서가 말을 잇지 못하자 정 박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이시회부터 소집해 볼까?”

정 박시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자 비서도 그의 뒤를 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