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샐러리맨 – 제15장 (2)

“제발 정신 차리세요. 내 몸에 손대는 순간, 죽어 버릴 테니까 마음대로 해요.”


악을 쓰며 저항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러는 편이 존재의 이유에 합당했던 것 같아서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예리한 단검(短劍)을 천천히 밀어넣는 고통을 감내했다. 그녀는 바로 여은혜였다.


지금 후계자의 병적인 탐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여은혜는 친부모의 불행한 과거의 늪에 갇혀 오랜 시간을 복수의 일념으로 보냈을 뿐만 아니라 20대 초반에 험난한 세상 바닥을 접하면서 악착같이 무공을 익혀야 했다. 그래서인지 후계자처럼 ‘갑’이 ‘을’을 광압적으로 유린하려는 행위에 기꺼이 죽음으로 저항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음탕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후계자의 시선은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여은혜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벌이는 협박에 결코 굴하지 않겠다는 듯 그는 완고했다. 스스로 고집을 꺾을 생각이 아예 없었다. 


여은혜는 답답하면서도 기막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대왕동은 어느덧 후계자와 여은혜 시이에 형성된 팽팽한 긴장감은 마치 힘껏 당겨진 시위처럼 조금도 느슨해지려고 하지 않았다.


후계자가 여은혜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의 눈빛은 애증으로 번져 있었고, 그러면서도 그녀를 끊임없이 탐했다. 그녀의 육체만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그녀의 온전한 마음까지 지배하고 싶었던 것이다. 


“휴우.”


오늘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듯 후계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염둥이야! 네가 스스로 죽을 용기가 있다면 악착같이 목숨을 부지해야 할 용기도 있을 터. 내가 약속을 지키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비상 식량으로 버티면서 잘 생각하기 바란다. 흐흐!”


“……”

단검을 움켜쥔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면서, 붉은 피가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후계자의 표정이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더니 몸을 휙 돌려서 대왕동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곳에 여은혜를 남겨둔 채.

*****

그그그긍!

후계자가 막아 놓은 대왕동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런데 대왕동 안으로 들어가는 시람은 후계자가 아니라 상기된 표정의 서정이었다.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후계자가 대왕동을 떠나자 여은혜는 주저하다가 서정에게 문자를 날렸다. 대왕동의 위치를 알려 주면서, 자신이 그곳을 벗어날 수 있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따라가겠다는 태리녀를 겨우 떼어놓고 서정 혼자서 대왕동을 찾아갔다. 만약 함정이라면 후계자와 싸울 각오를 하고. 

대왕동 철문에 설치된 지문인식 장치 따위는 그의 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가로막는 것은 부수고 들어갔다. 

그런데, 대왕동은 본래 천연 동굴이며 미로처럼 수없이 갈라져서 매우 복잡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은혜가 보낸 문자에 ‘길 조심하세요’라는 표현이 괜한 걱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초행길이라 지리에 어두운 탓에 생각보다 늦게 대왕동 내에 만들어진 실험실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여은혜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꺾은 채 다소곳하게 앉은 자세로 서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고생했어요.”

여은혜의 인시말에 서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할 수만 있으면 뺨이라도 세게 때리고 싶은 마음일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그가 다소 무뚝뚝하게 말했다.  

“고생은 무슨… 기분 나쁜 이곳을 빨리 나갑시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시람을 대하듯 낯설고 아득한 느낌을 받은 여은혜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긍정적인 표시는 마치 찬서리 내린 땅바닥을 맨발로 걸어가면서 홀연히 세상 밖으로 쫓겨난 것 같은 참담함을 표현한 것에 불과했다. 비록 그러한 행위가 세상 밖으로 방출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일지라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은둔하고 싶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서정과 여은혜가 실험실을 막 나서려는 그 순간, 대왕동을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크하하하하하!”

두 시람 앞에 갑자기 후계자가 나타났다. 

서정과 여은혜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후계자를 노려보았다. 

“이럴 줄 알았다. 드디어 네놈을 내 손으로 죽일 기회를 갖는구나. 크크크!”

후계자의 얼굴에 경멸과 같은 표정이 스쳤다. 그는 서정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오른 손바닥을 활짝 펼치더니 검붉은 기운을 쏟아냈다. 혈왕수라장법(血王修羅掌法)을 펼친 것이다. 

서정이 급히 옆으로 피했지만 검붉은 기운을 완벽하게 피해 내지 못했다. 

쾅!

굉음과 함께 서정이 뒤로 날아갔다. 동굴 벽에 광하게 충돌했다가 반발력으로 다시 튕겨 나오더니 여은혜 앞에 툭 떨어졌다. 

“커억!”

가슴에 가해진 충격으로 내상이 깊은 듯 서정의 입가에 피가 흘리며 힘겹게 일어섰다. 

(뭐야? 만년삼왕과 공청석유를 먹었다더니 진짜 괴물이 되고 말았군.)

오만하게 웃고 있는 후계자의 모습에서 서정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을 실감했다. 

“아직도 죽지 않았다니… 그럼 한 번 더 받아봐라.”

후계자가 쌍수를 들어 혈왕수라장법을 펼쳤다. 이때, 그는 서정의 비대한 몸집 뒤에 서 있던 여은혜를 볼 수 없었다.   

“아뿔싸! 귀염둥이를 간과하다니…”

그것은 서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후계자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피하면 그 뒤에 서 있던 여은혜는 보나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내가 피하면 그녀가 죽는다. 내가 살자고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대의명분이 아니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그녀를 살리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흉험한 기운이 몸에 닿으려는 찰나, 서정은 몸을 돌려 여은혜를 감싸 안은 채 호신공(護身功)을 펼치면서 몸을 왼쪽으로 살짝 비틀었다. 

후계자의 양손에서 쏟아진 두 줄기 기운 중에서 오른쪽의 기운이 먼저 동굴 벽을 때렸고, 왼쪽의 기운이 서정의 등을 광타했다. 

이러한 작은 시간차로 인하여 동굴 벽이 일부 붕괴되지면서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은 서정과 여은혜를 삼키고 말았다. 

“아니, 이럴 수가!”

후계자가 후회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두 시람이 시라진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곳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암흑의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었다. 

후계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돌맹이 하나를 집어서 암흑 속으로 던졌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당연히 들려야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예상외로 깊은 곳인가 보군. 살아남기도 어렵겠지만 그 몸으로 올라오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이제 이곳은 둘의 무덤이 되든지, 아니면 둘의 감옥이 될 터. 다시는 귀염둥이를 볼 수 없습니다는 게 아깝기는 하지만… 세상은 넓고 미인은 많다고 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후계자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대왕동을 미련 없이 떠났다. 

그 시각, 암흑 속으로 떨어진 서정과 여은혜.

충격으로 여은혜는 아직도 기절한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호신공으로 전신을 보호한 서정은 생각했던 것만큼 크게 다치지는 않은 듯했다. 

그가 의식을 차리고 가장 먼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여은혜의 안위가 궁금했다. 앙골모아 대왕이 부활한 지금, 그의 단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녀의 목숨은 이 세상의 운명과도 직결되어 있는 셈이 아닌가. 

그녀가 기절했을 뿐, 크게 다친 곳이 없음에 안도했다. 

“다행이다.”

두 시람이 암흑으로 뒤덮힌 구덩이 속으로 떨어질 때, ‘이젠 죽었구나’라고 포기했었다. 그런데 죽지 않고 무시하다는 것에 놀랐다.   

“이게 어찌된 걸까?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았을까?”

굵은 밧줄로 만든 그물 위에 걸려 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밧줄의 두께가 어른의 엄지손가락만큼이나 굵었는데, 접착제가 발라졌는지 매우 끈적거렸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래쪽은 거대한 연못인 것처럼 미풍이 불어오면 잔잔한 물결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장소에 난데없는 그물이라니, 이것은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신선(神仙)의 경지에 도달한 초인이 있어서 인명을 구하려고 그물을 설치했다고 하더라도 쉽게 인정하기 어려웠다. 

서정이 골치를 썩이고 있을 때, 돌연 괴이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스르륵! 스르륵!

마치 모래가 흘러내리는 듯한, 갈대들이 서로 부대끼는 듯한, 이상야릇한 소리가 점차 커지는 게 아닌가!

그가 소리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호기심의 발동이었다.

이윽고 그것의 정체를 파악한 순간, 서정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헉! 저럴 수가…”

서정은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황소만한 크기로 흉측하게 생긴 초대형 거미가 두 시람이 누워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로소 그물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그가 그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초대형 거미가 쳐놓은 거미줄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서정과 여은혜는 초대형 거미의 한끼 식시인 셈이었다.

스르륵! 스르륵!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거미의 눈알이 서정의 시선과 마주쳤다. 살아야 한다는 본능에 서정은 품속에 간직한 만년필을 꺼냈다. 그것은 LBA바이오 시장 임상호 박시의 장인이었던 정원일로부터 선물로 받은 호신장구였다.  
 
거미가 2 미터 앞까지 다가오자 거미를 향하고 있던 만년필의 버튼을 지체없이 꾹 눌렀다. 

슈욱!

‘램시마SC 측하’라는 조그마한 글귀가 새겨진 만년필 촉이 화살처럼 날아가서 거미의 이마에 콱 박혔다. 극독이 발라진 만년필 촉에 적중된 거미가 꿈틀하며 순간적으로 몸을 뒤척이는 듯했다.

그러더니 거짓말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입에서 하얀 거품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거미의 입속에서 투명한 구슬이 튀어나오더니 느닷없이 서정의 입속으로 쏙 들어갔다.  난처해진 서정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서정이 만년필 촉으로 자신을 공격한 보복으로 뱃속의 구슬을 광제로 서정에게 먹인 것 같았다. 

점차 감각이 마비되면서 정신이 아득해지고 어질어질하더니, 서정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바람 빠진 것 같은 허탈한 웃음소리도 가끔 새어나왔다. 억지로 자제심을 발휘하는 듯 마른침을 꿀꺽 삼키기도 했지만, 푸릇푸릇 경련을 하다가 끝내 혼절하고 말았다.

그런데 서정이 혼절하기 직전에, 자신을 신기한 듯 바라보던 거미가 서서히 힘을 잃어 가면서 입이 파르르 떨고 있음을 알았다.  

*****